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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D 이후의 길들



한 가지 길만 있다고 믿었던 때

박사학위를 마치고 나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학계’라는 길 위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곤 해요.

연구를 계속하고, 논문을 쓰고, 다음 펠로우십을 준비하는 일들이 너무 익숙해져,
마치 그 길만이 당연한 다음 단계처럼 느껴질 때가 많죠. 

 

고백하자면, 저는 약 10년의 포닥 기간을 거친 후에야 산업계로의 전환을 결심했어요.

한국과 해와를 오가면 보낸 그 시간 동안, 저는 수많은 진로 고민을 했었습니다. 

 

'이번 프로젝트만 끝내면...'
'다음 논문만 내면...'

 

그렇게 1년이 2년이 되고, 5년이 지나고, 어느새 1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더라고요.

솔직히 돌이켜보면 그것은 우유부단함이자 애착, 그리고 두려움이었어요.

 

'지금 학계를 떠나면 그동안의 시간이 낭비가 되는 건 아닐까?'
'이 나이에 산업계에서 받아줄까?'
'학계를 떠나는 것은 포기를 의미하는 걸까?'

 

그래서 전 "용기"라는 단어를 쓰기로 했어요. 전환이 아니라, 용기를 것이죠.

 


‘산업에서 과학자로 살아가기’: 한 기사와의 만남

얼마 전, Chemistry World에 실린 "Re-establishing my scientist identity in industry"라는 글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Re-establishing my scientist identity in industry

How to embrace a career transition outside of academia

www.chemistryworld.com

 

제목을 보는 순간 마음이 멈칫했습니다.
‘산업계에서 과학자로서의 정체성을 다시 세운다’는 말이
어떤 감정과 무게를 담고 있는지 그 무게를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인데요.

 

학계를 떠나는 일은 연구실에서 보내온 시간, 쌓아온 전문성, 스스로를 바라보던 방식까지
모두 다시 바라보게 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기사의 저자 역시 비슷한 경험을 이야기했는데요.
학계에서의 경력과 명성을 뒤로하고 산업계에서 entry-level 역할로 시작할 때,
그 경험이 “한 발 뒤로 물러서는 것처럼 느껴졌다”고 고백합니다.

 

하지만, 기사에서도 말했듯이,

산업계로의 전환은 정체성의 종말이 아니라, 확장이라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박사 과정과 포닥 동안 갈고닦은 비판적 사고, 문제 해결 능력, 복잡한 데이터 해석 능력은
산업에서도 여전히 유효해요.
다만 그것을 연구 목적이 아닌 비즈니스 목표에 맞게 조정하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기사의 마지막 문장이 오래 남는데요,

“다른 역할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과학자는 결국 다시 성장할 수 있다. 때로는 학계에서 꿈꿨던 자리보다 더 큰 위치에 도달할 수도 있다.”

 

저는 이 문장이, 저와 비슷한 고민을 하고 계실 분들께도
작은 숨을 고를 여유가 되어드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개인적인 이야기: 내가 조금 더 일찍 알았더라면

산업계로 온 지 어느덧 몇 년이 지났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초반은 쉽지 않았습니다.
학계와는 다른 의사결정 속도, 실용성과 효율을 중시하는 문화,
때로는 진행하던 연구가 전략 변경으로 갑자기 중단되어 Redundancy까지..

연구의 방향이 논문이 아닌 비즈니스 목표에 따라 조정되는 현실도 낯설었습니다.

[경력 재구성] 시작하며: 10년 만에 다시 묻는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새로운 길을 발견하는 순간

 

내 정체성은 직함이나 소속으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나는 여전히 과학자입니다.

그저 연구가 표현되는 방식이 달라졌을 뿐이죠.
저는 여전히 가설을 세우고, 실험을 설계하고, 데이터를 분석하고, 문제를 해결합니다.
다만 그 결과물이 논문이 아니라 제품 개선, 서비스 향상, 혹은 실제 사용자에게 닿는 변화로 나타날 뿐입니다.

 

그리고 예상 외로 가장 크게 다가온 보람은,
내가 한 일이 현장에서 바로 영향력을 가진다는 점이었습니다.
실험실 바깥의 세계에서, 연구가 ‘바로 쓰이는’ 순간을 목격한다는 것.
그 경험은 생각보다 강력했습니다.

 

돌아보면,
이 전환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조금 더 일찍 알았더라면
조금은 덜 두려워하고, 더 준비된 마음으로 넘어올 수 있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저보다 조금 덜 외롭고, 조금 더 단단하게 다음 단계를 맞을 수 있기를 바라면서요.

 이 연재에서 다루고 싶은 것들 

이 글들은 저처럼 진로에 대해 오랜 고민을 하신 분들께 도움이 되셨으면 합니다. 특히:

 

  • "너무 늦은 건 아닐까" 걱정하는 포닥들
  • 학계를 떠나는 것이 포기처럼 느껴지는 분들
  • 산업계가 궁금하지만 막연히 두려운 분들
  • 이미 전환했지만 정체성 혼란을 겪는 분들

그리고 가능하다면, 다양한 주제들도 다루고자 해요:

  • 학계에서 산업계로, 그리고 그 반대 경로
  • 비연구직으로의 전환 (과학 커뮤니케이터, 정책 전문가, 컨설턴트 등)
  • 실제 전환 과정의 현실 (이력서, 네트워킹, 인터뷰)

정답은 없다, 하지만 알고 선택할 수는 있다

이 글은 “학계를 떠나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학계에 남는 것도, 산업계로 나아가는 것도, 혹은 전혀 다른 길을 찾는 것도 모두 유효한 선택입니다.
중요한 것은 선택지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각 길이 의미하는 바를 차분히 살펴본 뒤 자신에게 맞는 방향을 선택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PhD는 하나의 직선 경로가 아니라, 여러 가능성이 열려 있는 출발점입니다.
저는 그 사실을 깨닫기까지 10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 시간을 후회하지는 않지만,
만약 조금 더 일찍 알았다면
조금 덜 두려워했고, 조금 더 준비된 마음으로 다음 단계를 맞이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 글을 읽는 누군가에게는,
그 ‘조금 더 일찍’이 지금이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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